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화의 대원정 (문단 편집) == 정화 원정의 현대적 의의 == 현대의 중국측이 정화의 원정을 중국의 [[패권주의]]와 [[팽창주의]]의 동기로 이용한다는 주장이 있다. 2010년대 들어 중국이 주도하는 [[일대일로]]나 중국이 동남아 여러 국가와 마찰을 빚는 [[남중국해 분쟁]]과 같은 패권주의를 비판적으로 보는 시각이 늘어났고, 이들은 정화의 원정이 중국의 팽창주의에 근거를 부여한다고 보는 것이다. [[에드워드 카]]가 말했듯이,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이기 때문에, 정화의 원정은 [[대국굴기]]를 추구하는 현재의 중국의 입맛에 맞는 역사적 사건임은 틀림 없다. 사실 명청시기에 나온 연의에서 보듯이 정화의 원정은 중국인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진취적 사건임에 틀림 없었으나, 위와 같은 이유로 명청 시대에는 그다지 높이 평가되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중국은 농업국가였고, 주민의 해외이주는 농업 노동력의 상실 및 세수의 감소로 보았기 때문에 적극 막았다. 명청시대 [[해금령]]은 청나라 말기까지 지속되었다. 정화의 해상원정이 본격적으로 재평가된 계기는 1907년 광동성 출신 인물인 [[량치차오]]가 정화의 해상원정을 현대 [[민족주의]]에 입각하여 평가하면서부터이다. 오늘날 동남아 화교들은 정화를 자신의 원조로 기려 정화 원정대가 거쳐갔던 [[말레이시아]] [[말라카]]에는 정화의 석상이 세워져 있으며 [[인도네시아]], [[필리핀]], [[태국]], [[캄보디아]] 등에 그의 사당이 만들어졌다.[* 현재 수천만명의 인구가 있는 동남아의 화교 커뮤니티도 아편전쟁 이후 청나라의 행정력이 약화되고 [[중국 대륙]]에 혼란이 잇다르자 [[광둥성]]과 [[푸젠성]] 주민들이 대거 해외이주를 하면서 확대된 것이다. 필리핀의 화교 커뮤니티야 17세기부터 번영하였으나, 이는 엄연히 예외적인 경우였고 이를테면 말레이시아의 화교 커뮤니티의 역사는 기껏해야 200년도 안된다. 중국인 개개인의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이주야 중세부터 있었겠지만 본격적인 중국인 공동체 형성을 기준으로 잡으면 19세기 즈음이 맞다.] 중국 본토 내에서 정화가 본격적으로 고평가되기 시작한 계기는 중국의 국력이 신장되어 외부로 눈을 돌리게 된 20세기 말기에 들어서였다. ||[[로드리고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이 “우리는 (헤이그) 중재법정의 판결을 갖고 있다”고 반박했고, 시 주석은 “맞다. 하지만 우리는 역사적 권리를 갖고 있다. 당신들은 최근 판결만 가졌을 뿐”이라며 명(明)대 정화(鄭和)의 남중국해 원정을 언급하며 중국 해역이라고 주장했다.[[http://news.joins.com/article/21593648|#]] || '''하지만 정화의 원정단은 [[제국주의]]나 [[팽창주의]], [[패권주의]]와는 거리가 멀었다.''' 정화 원정대는 방문한 지역들의 종교와 문화, 상당히 주권을 존중하였다. 이는 당시 기준으로 놀랍도록 신사적인 방식이었는데 [[대항해시대]]에 [[포르투갈]] 등이 보여준 초창기 제국주의에 해당하는 면모, 폭력적인 충돌, [[노예무역]], 강제 개종 및 식민지 주민 강제 착취 징병 등이 흔했던 것과 명백한 대조를 이루었다. 예를 들어 [[바스코 다 가마]]나 [[페드로 알바레스 카브랄]]과 같이 정화 사후 약 50-60년 지나 정화가 기항한 같은 곳들에 닿은 포르투갈 탐험가들은 당시 기준으로도 유달리 잔혹했다. 이미 항복하고 몸값까지 다 지불한 민간인들을 임산부조차 봐주지 않고 마구잡이로 능욕하고 학살하였다. 때문에 이들은 당시 유럽인들 사이에서도 상당한 지탄을 받았던 바 있다. 당시 뱃사람들이 다 거친 사람이긴 했다만, 해적들 사이에서도 '''몸값을 낸 사람을 함부로 죽이면 안 된다는 불문율'''이 있었는데 명실공히 왕실에서 보낸 사람이 이를 어겨서 비난 받았던 것이다. 정화 함대가 당시의 포르투갈인들과 달랐던 대표적인 사례가 있다. 정화 함대가 [[스리랑카]]에 남긴 비문은 [[중국어]], [[타밀어]], [[페르시아어]] 3가지로 되어 있었는데, 페르시아어 비문은 "하나님([[알라]]) 덕분에 무사한 항해가 가능했다"는 종교적인 내용이, 타밀어 비문은 현지 타밀 힌두교도들을 고려하여 [[힌두교]] 관련한 내용이, 한문으로는 외교 성과 관련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었다. 애초에 정화가 여러 공신들을 제치고 황제 직속의 정사로 발탁된 이유 중 하나가 [[무슬림]] 출신이지만 [[불교]]와 [[도교]], [[유교]]에 대한 이해가 무척 높았던 점에 있다. 문화 교류 측면에서만 놓고 보면 정화의 해외 원정은 오늘날에 봐서도 선진적이었다. 비교하자면 정화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나 [[바스쿠 다 가마]]보다는 중국으로 파견되었던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 아즈텍 문화 유산을 보존하고 원주민들을 교육하는데 힘썼던 스페인의 [[https://en.wikipedia.org/wiki/Bernardino_de_Sahag%C3%BAn|베르나르디노 데 사아군]]과의 비교가 더 적절한 인물일 수도 있다. 이런 대규모 원정대가 기항하는 곳에서 약탈이나 살육과 같은 무리수가 따를 수도 있었지만, 정화의 함대는 타지에서도 공정하게 보급품을 거래했고, 무력개입도 현지 동맹 세력의 요청이 있거나 명나라 원정대가 공격받을 때에만 행하는 등 ([[실론]]), 전근대 시대의 항해자로서는 상당히 이례적이었다. 정화 원정 당시 창궐하던 [[왜구]]들은 더 말할 것도 없고, 서유럽 각국은 [[사략선|사략함대]]를 운용하면서 해적질을 공인하거나 아예 국가가 직접 운영했다. 정화의 원정후인 1492년 아메리카 대륙에 닿은 [[콜롬버스]]는 [[아메리카 원주민]]을 상대로 한 여러 악행이 계속 발굴되면서 21세기가 들어선 이래 여러 기념물들이 철거되고 있다. 현재 말레이시아나 인도네시아, 태국, 캄보디아 같이 정화의 함대가 기항했던 국가에서도 나쁜 이미지 없이 정화의 동상이나 사당, 모스크가 건립되어 정화의 탐험을 기념하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